새 옷 입고 싶지만 사고 싶지 않다… 누울리는 어떻게 ‘패션 렌털’을 키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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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2026.09.17 00:49 PDT
새 옷 입고 싶지만 사고 싶지 않다… 누울리는 어떻게 ‘패션 렌털’을 키웠나
월 98달러에 의류 6벌을 빌리는 누울리의 구독 서비스를 표현한 그래픽 (출처 : 더밀크)

[CEO 포커스] 월 98달러에 의류 6벌 대여 ... 미국 누울리의 혁신
옷을 더 많이 파는 대신, 고객이 옷을 경험하고 돌려보내고 다시 선택하게 유도
패션 렌털이 아니라 소유 부담 줄이고 고객 관계 매달 반복시키는 '거래 모델 재설계'
AI는 이 모델에 추천·사이즈 예측·재고 배분을 더해 부가가치 키워.

기존 사업의 매출을 잠식하는 일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가 할 수도 있다.
데이브 헤인

옷을 파는 회사가 고객에게 옷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고 돌려보내면 다음 달에는 다른 옷을 고를 수 있다. 새 옷을 사려던 고객이 대여로 돌아설 수도 있는 사업이다.

미국 의류 대여 서비스 누울리(Nuuly)의 데이브 헤인(Dave Hayne) 사장은 그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대여 사업이 잘되면 기존 옷 판매가 줄어들 수 있다. 그래도 고객이 원하는 구매 방식을 다른 회사에 전부 맡기지는 않겠다는 모험적 선택이었다.

헤인의 아버지는 의류 유통기업 어반 아웃피터스(Urban Outfitters)의 공동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리처드 헤인(Richard Hayne)이다. 아버지가 옷을 파는 사업을 키웠다면 아들은 같은 회사 안에서 옷을 빌려주는 사업을 키웠다. 누울리는 2026년 6월 초 활성 구독자 50만 명을 넘어섰다.

창업자의 아들, 티셔츠를 접는 일부터

데이브 헤인은 2001년 어반 아웃피텃트 그룹에 입사했다. 처음 6개월은 필라델피아 매장에서 티셔츠를 접고 고객을 응대했다. 관심을 둔 분야는 당시 회사가 새로 추진하던 전자상거래였다. 온라인으로 물건을 팔기 전에 매장에서 고객을 만난 것이다.

이후 프리피플(Free People)의 웹사이트를 선보였고 온라인 사업과 운영을 맡았다. 지금은 누울리 사장과 그룹의 최고기술책임자(CTO)를 겸한다. 모교인 트리니티 칼리지 인터뷰에는 매장과 온라인을 오간 경력이 소개돼 있다.

그 경험은 누울리의 사업과 맞닿아 있다. 고객은 화면에서 옷을 고르지만 서비스를 평가하는 순간은 실제 옷을 받아 입을 때다. 옷이 몸에 맞고 상태가 좋아야 한다. 입고 싶은 날에 맞춰 도착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시 돌려보내는 일이 번거로우면 다음 달 구독을 망설이게 된다.

헤인이 맡은 사업에서는 옷을 잘 고르는 일과 배송을 잘하는 일이 떨어져 있지 않다. 고객의 취향을 읽는 상품팀, 주문 화면을 만드는 개발팀, 옷을 준비하는 물류팀이 같은 경험을 만든다. 한 곳에서 생긴 불편이 다음 달 결제 여부에 영향을 준다.

누울리를 기존 의류 브랜드 하나가 더 생긴 것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다. 새 디자인을 더하는 데서 나아가 고객이 옷을 이용하는 방법을 바꿨다. 회사가 상품을 관리하는 기간도 판매 이후까지 길어졌다.

새 옷을 입고 싶지만, 매번 사고 싶지는 않다

데이브 헤인과 팀은 2017년 시장 조사를 거쳐 누울리를 구상했다. 다양한 스타일을 경험하고 싶지만 비싼 옷을 바로 사기는 부담스러운 고객에게 기회를 봤다. 더 많은 옷을 입어보고 싶은 욕구와 구매 부담 사이에 대여가 들어갈 자리가 있었다.

누울리는 그룹 브랜드뿐 아니라 외부 브랜드의 옷도 함께 제공한다. 고객은 한 브랜드 안에서만 고를 필요 없이 여러 브랜드의 옷을 조합할 수 있다. 같은 서비스에서 출근할 때 입는 옷과 휴가 때 입는 옷을 함께 찾는 식이다. 옷의 종류를 넓혀 일상에서 이용할 기회를 늘리는 구성이다.

누울리의 현재 기본 서비스는 월 98달러에 원하는 의류 6벌을 빌리는 방식이다. 배송과 반납, 세탁과 수선을 요금에 포함한다. 마음에 든 옷은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 구독을 잠시 멈추거나 해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고객에게는 선택 기준이 달라진다. 옷을 살 때는 앞으로 얼마나 자주 입을지 생각한다. 기본 티셔츠나 청바지는 고르기 쉽지만 평소와 다른 디자인은 망설이게 된다. 대여라면 오래 소유할지보다 이번 달에 입어보고 싶은지가 먼저다.

옷을 입고 난 뒤의 부담도 줄어든다. 직접 세탁소를 찾거나, 옷장에 넣어두거나, 중고로 팔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적다. 반납한 뒤의 일은 회사가 맡는다. 고객이 내는 돈에는 옷을 입는 기회와 이런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서비스가 함께 들어 있다.

출근복과 청바지, 모임에 입을 원피스를 한 번에 고를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특별한 날을 위한 한 벌에 그치면 이용할 때가 드물다. 일상에서 입는 옷까지 선택지에 넣으면 매달 돌아올 이유가 생긴다. 누울리는 평소 생활에 맞춰 대여를 이용하도록 설계했다.

대여 뒤 구매할 수 있다는 선택도 자연스럽다. 고객은 실제로 입어본 뒤 자신에게 잘 맞는지 판단한다. 계속 가지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면 구매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납한다. 회사는 대여와 판매를 한 서비스 안에 연결한다.

누울리 홈페이지

미니 피봇 : 기존 브랜드의 힘을 쓰고, 새 사업에 집중할 팀만 빼다

누울리에는 출발부터 활용할 자산이 있었다.

어반 아웃피터스 그룹은 프리피플과 앤트로폴로지(Anthropologie), 어반 아웃피터스 같은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헤인과 팀은 고객 데이터, 디자인 인력, 지원 조직과 투자 자금을 활용했다.

고객이 이미 알고 있는 브랜드의 옷을 빌릴 수 있다는 점은 서비스의 매력을 설명하기 쉽게 만든다. 회사에도 유리한 조건이다. 옷을 고르고 유통해온 경험을 새 사업에 쓸 수 있다. 처음부터 상품과 고객, 운영 기반을 모두 마련할 필요가 줄어든다.

동시에 누울리는 대여 사업에 집중하는 별도 팀을 구성했다. 기존 회사의 자원을 활용하면서도 상품 구성과 고객 응대, 세탁과 검사처럼 새 서비스에 필요한 일을 맡을 조직을 둔 것이다.

판매와 대여는 같은 옷을 다뤄도 업무가 다르다. 대여에서는 고객에게 보낸 옷이 다시 돌아온다. 회사는 상태를 살핀 뒤 다음 고객에게 보낼 준비를 한다. 고객이 늘수록 이 과정도 함께 늘어난다. 대여를 기존 판매의 부수적인 업무로만 처리하기 어려운 이유다.

기존 매장에서 옷 한 벌을 덜 팔았다는 사실만 보면 대여는 손해처럼 보인다. 그러나 같은 고객이 매달 구독료를 내며 회사와 관계를 이어간다면 계산은 달라진다.

출시 직후 코로나19, 그래도 사업을 이어갔다

누울리는 2019년 서비스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가 확산했다. 외출과 모임이 줄어드는 상황은 새로운 옷을 빌려 입는 사업에 부담이었다. 고객이 대여 서비스에 익숙해질 시간을 갖기도 전에 환경이 바뀌었다.

헤인은 트리니티 칼리지 인터뷰에서 당시 어려움을 겪었지만 회사를 닫지 않고 버텼다고 회고했다. 이 결정은 누울리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서비스를 유지했기에 이후에도 고객에게 상품을 제공하고 이용 경험을 쌓아갈 수 있었다.

사업을 계속하려면 판단을 실행할 자원도 필요하다. 사람을 유지하고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돈이 든다. 누울리는 기존 브랜드와 투자 자금을 가진 그룹 안에서 출발했다. 헤인의 결단을 볼 때 모회사의 지원 능력을 함께 살펴야 하는 이유다.

다만 버틴 시간 자체가 고객의 다음 결제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고객이 돌아왔을 때 고르고 싶은 옷이 있어야 하고 배송과 반납도 원활해야 한다.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 있는 누울리 풀필먼트 센터. 누울리는 의류 회수·검수·세탁·재출고 과정에 자동화를 확대해 물류비를 낮추려 하고 있다. (출처 : 누울리 제공)

50만명 돌파, 고객이 다음 달에도 남는 이유

최근 실적은 누울리가 얼마나 커졌는지 보여준다. 어반 아웃피터스의 발표에 따르면 2026년 7월 31일에 끝난 분기 누울리 매출은 1억7860만 달러였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약 29% 증가했다.

헤인은 8월 26일 실적 설명회에서 분기 평균 활성 구독자가 48만4000명이며, 6월 초에는 50만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분기 영업이익은 약 1800만달러였다. 옷을 반복해서 빌려주는 사업이 매출과 이익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가 설명한 성장의 중심에는 상품 구성, 고객 경험, 운영이 있었다. 누울리는 고객의 취향에 맞는 옷을 추천하는 기능을 개선했다. 헤인은 넷플릭스(Netflix)와 디즈니플러스(Disney+)가 많은 콘텐츠 가운데 개인에게 맞는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을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대여 후 설문을 활용한 사이즈 안내도 도입했다.

옷이 많다고 고르기까지 쉬운 것은 아니다.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고객은 무엇이 자신에게 맞을지 찾는 데 시간을 쓴다. 대여한 6벌 가운데 실제로 입고 싶은 옷이 많아야 구독료를 낼 이유도 분명해진다. 추천과 사이즈 안내는 그 선택을 돕는다.

배송과 세탁은 그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마음에 드는 옷을 골랐어도 입을 날이 지난 뒤 도착하면 만족하기 어렵다. 돌아온 옷을 빠르게 준비해 다음 고객에게 보내야 상품도 오래 활용할 수 있다. 고객이 느끼는 편리함과 회사의 수익성이 같은 작업에 걸려 있다.

회사는 시설 확장과 자동화 투자도 이어가고 있다. 구독자가 늘면 옷을 회수하고 세탁하고 검사하는 일도 늘기 때문이다. 누울리에서는 가입자를 모으는 속도만큼, 늘어난 주문을 감당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중고 냄비까지, 판매 이후의 기회를 찾다

미국의 주방용품 유통기업 수라테이블(Sur La Table)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만한 사례가 나왔다. 수라테이블은 지난 8월 개인 간 재판매 서비스 세컨드 서빙스(Second Servings)를 선보였다. 고객이 쓰던 조리도구와 주방용품을 다른 고객에게 팔도록 연결한다.

판매자는 대금을 현금이나 수라테이블 매장 크레딧으로 받을 수 있다. 재판매 전문기업 아카이브(Archive)가 고객 지원과 결제, 물류를 맡는다. 매장 크레딧은 물건을 정리한 고객이 같은 브랜드에서 다시 구매하는 데 쓸 수 있다.

누울리는 회사가 보유한 옷을 빌려주고, 수라테이블은 고객이 가진 물건의 다음 주인을 연결한다. 거래 방식은 다르다. 두 사례를 잇는 지점은 상품을 판매한 뒤에도 브랜드가 고객과 만날 기회를 만든다는 데 있다.

더밀크의 시각: 고객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바꾸다

누울리가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고객은 왜 옷을 사지 않을까?

새로운 스타일을 입어보고 싶은 욕구는 있다. 하지만 매번 돈을 내고, 보관하고, 세탁하고, 싫증 난 옷을 처리하는 일은 부담이다. 고객이 망설이는 지점은 옷 자체가 아니라 소유의 비용이었다. 누울리는 그 비용을 대여와 구독으로 바꿨다.

이 선택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옷을 빌려주면 일부 고객은 새 옷을 덜 살 수 있다. 기존 매출을 스스로 잠식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데이브 헤인은 더 큰 위험을 봤다. 고객이 원하는 새로운 소비 방식을 다른 회사가 가져가는 것이다. 누울리는 판매를 지키기보다 고객과의 관계를 지키는 쪽을 택했다.

한국의 소비재·유통기업도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고객이 정말 가격 때문에 멈추는가. 자주 쓰지 않을 것 같아서인가. 관리와 보관, 처분이 번거로워서인가. 구매가 일어나는 순간만 볼 것이 아니라 구매가 멈추는 이유를 봐야 한다. 새로운 사업은 대개 그 지점에서 열린다.

물론 모든 상품이 대여와 구독에 맞는 것은 아니다. 반복 사용을 견딜 수 있어야 하고, 회수·검수·세탁·수선·재배송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고객 경험과 물류 운영이 함께 설계되지 않으면 대여는 혁신이 아니라 비용 덩어리가 된다.

그래서 누울리의 본질은 패션 렌털이 아니라 거래 방식의 재설계다. 같은 옷이라도 한 번 팔고 끝낼지, 여러 고객이 반복해서 경험하게 할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업이 된다. 콘텐츠는 그대로여도 유통 방식이 바뀌면 새 비즈니스가 생긴다. AI가 여기에 더해지면 추천, 사이즈 예측, 재고 배분, 수요 예측, 물류 자동화까지 붙으면서 부가가치는 더 커진다.

누울리의 교훈은 분명하다.

자기 사업을 잠식할 용기가 없는 기업은 결국 고객의 변화를 남에게 빼앗긴다. 혁신은 기존 매출을 지키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고객이 이미 바꾸고 있는 행동을 회사가 먼저 사업으로 받아들일 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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